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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에라한테 연락 왔어.”

  “…그래?”

 

  제 친구의 말에 남자는 더러운 방을 치우던 손을 멈췄다. 제가 답을 하지 않으니 그에게 연락을 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그런 남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할까?”

  “먼저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를 알려줘.”

  “별 거 아냐. 너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여전히 티에라는 걱정이 많네. 나한테 연락하면서 내 얘기는 하나도 없어.”

 

  어깨를 으쓱해 보인 제 친구에게 남자는 잠깐의 침묵 뒤에 답했다.

 

  “별 일 없다고 해. 안 그러면 이제 네가 매번 연락을 받게 될 테니까.”

  “티에라한테 연락이 계속 왔었어?”

 

  벽지가 벗겨진 벽에 기대어, 휴대폰의 텍스트를 치면서 친구가 묻자 남자는 고갤 끄덕였다.

 

  “오늘은, 그러게. 열네 번 정도 내게 전화했어.”

  “열네 번? 티에라한테 너 무슨 짓이라도 한 거냐?”

 

  이번에는 고갤 내저었다. 그녀에게 한 짓은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요즘 만나지도 않았다. 만날 정도로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만나면 그를 오랫동안 놓아주고 싶지 않아했으니까. 일분일초가 아까운 지금, 그녀를 만나봤자 제게 오는 것은 마이너스적인 요소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피하기로 했다. 그녀가 아무리 저를 부른다고 한들, 그의 목적을 위해서.

 

  “티에라도 대단하네. 그렇게 거절당하고 있는데 끝까지 포기 안 하고 급기야는 나한테까지 연락하다니.”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의 문자를 보내는데 집중하고 있는 제 친구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남자는 다시 시선을 옮겼다. 알고 있다. 티에라가 제게 요즘 들어 계속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만났을 때에도 그랬다. 안 좋은 예감이 든다고 그랬다. 그러면서 그녀는 저를 보면서 말하지 않았던가? 역시 혼자 행동하는 건 그만두고, 그 녀석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그 말은, 그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 들은 말과 같은 것이었다.

 

  제가 그걸 받아들인다니, 말도 안 된다. 애초에 저는 그게 싫어서 밖으로 나와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던 게 아닌가? 그걸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제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얻을 수 있는 승리가 아니게 된다. 그는, 영원히 패자인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만일 녀석과 손을 잡아서 이번 일이 잘 끝나게 된다고 한들, 분명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못한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1등’에게만 돌아가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2등이라는 자리에만 있어야 했던, 그라면.

 

  그래서 그녀에게 화를 냈다. 별 말은 안 했던 거 같다. 그냥, 저를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사라져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던 걸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녀는 제게 있어서 언제나 플러스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잘 사용하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 그녀였다.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 나서서 그가 이 자리에 오르게 디딤판이 되어 준 것도,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와준 것도, 저번에 큰 화상을 입고서 살아나게 도와준 것 역시 그녀였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더욱 화가 났다. 제 승리를 누구보다도 바란다 했던 그녀였기에. 여태까지 한 말과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제 손발처럼 부릴 수 있는 부하가 사라졌고, 그는 스스로 모든 일을 행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으니 그녀는 그의 손에 남은 유일한 도구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제게 그런 약한 소리를 한 것이다. 그의 승리를 빼앗아가려는 것처럼, 그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처럼.

 

  그녀는 그가 화를 냈을 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시선은 바닥을 향해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무슨 말을 해도 맞받아치던 그녀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그 때나 지금이나, 어떻게 제가 먼저 그 세계적인 살인귀를 잡을 수 있을지에 쏠려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나와있지 않은가?

 

  “티에라의 얘기는 됐어. 그것보다 이전에 부탁했던 거, 어떻게 된 거야?”

  “정말이지, 여자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안 받아주는 너도 신기해죽겠다. 티에라가 하우스에서 인기 많았던 거 너도 알잖아, 멜로.”

  “그거야 그녀가 멋대로 몸을 굴리면서 살았으니까 그랬겠지.”

 

  그의 말에 친구는 역시 이해 못하겠다니까, 하고 말하며 어깰 으쓱거렸다.

 

  “뭐, 좋아. 나도 여자친구나 만들까 봐. 티에라가 너한테 해주는 것만큼 잘해주는 여자친구 말이야.”

  “…보고나 해.”

 

  다 찢어진 소파 위에 앉은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는 다시금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주머니에 게임기를 집어넣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는 그의 말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하여 그는 시선을 떨궜다. 예의 일본 형사로부터의 연락이다. 그 내용을 찬찬히 살피던 그는 그녀를 사용할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했다. 제 친구에게서 얘기를 전부 듣고 난 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드디어 티에라한테 해주는 거야?”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남자는 자리를 피해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낡은 판자들을 다 올라서고 나서, 그는 제 부재중 통화 목록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번호를 누른다. 두어 번의 신호음이 가더니, 곧바로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티에,”

  “달링? 괜찮아?”

 

  남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성급하다.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라,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괜찮아. 그것보다 티에라,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부탁하고 싶은 일? 어떤 건데?”

  “미행. 할 수 있나?”

 

그녀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당연히 알겠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 했다.

 

  “오, 미행이라……. 못할 것도 없지만…….”

  “……….”

 

  그는 말없이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여자는 잠깐의 침묵 뒤에 말했다.

 

  “대신에 조건이 있어.”

  “조건? 아아, 네가 평소에 내게 걸던 거래의 답례라면 괜찮아. 이전에 지불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까.”

  “오, 아니, 달링. 그게 아니야.”

 

  그녀의 단호한 말투가 순간 그를 멈칫하게 했다. 그녀의, 옅은 한숨 소리가 수화기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줄래?”

  “무모한 짓?”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묻자 여자는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역시 너무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러니까 절대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내게 약속해줘.”

 

  남자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달링이 위험해질 것 같아. 어떤 이유에서든, 무언가 나쁜 예감만 든다고. 이전보다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불안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피곤하다. 남자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한 번 쓸더니 대답했다.

 

  “나는 내 승리를 눈앞에 두고 패배하지 않아.”

  “그렇지만 혹시 달링이 위험해지면,”

 

  남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여자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티에라, 너는 내 승리를 바라는 사람인가?”

  “…오, 물론이지. 나는 그러기 위해서 달링을 돕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이유는 없어. 내 말을 들어.”

 

  여자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침묵이 생소했다.

 

  “…자세한 내용은 내가 너에게 보낼게. 그러니까 미행을 부탁해.”

  “…내게 약속해주진, 않는 거야?”

 

  여자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즉답했다.

 

  “애초에 네게 약속을 한들, 나는 내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거야. 그것이 무모한 짓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가 이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오, 그래. 달링은 늘 그랬지.”

 

  여자는 잠깐 말이 없다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어, 달링. 달링이 내게 그러길 원한다면, 기꺼이 해줄게. 나는 죽어도 상관없어.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 하지만 달링이 위험한 모습이나, 무모한 짓을 하려면 나는 적극적으로 막을 거야. 상대가 그 키라라고 해도 달링의 죽음은 용납할 수 없어.”

 

  “…쓸데없는 참견이야.”

 

  그의 말에 여자가 하, 하고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나는 네 죽음을 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나온 게 아냐, 멜로.”

처음으로 듣는, 이 여자의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 화는 마치 오랫동안 누르고만 있었던 것 같은 목소리다. 그는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럼 역으로 묻겠는데, 너는 뭘 위해서 나를 돕겠다고 한 거야?”

  “…글쎄, 왜일까. 달링은 알면서 내게 묻고 있는 거겠지? 언제나 같은 방법이네. 그렇지?”

 

  그렇게 말한 여자는 평소처럼 실없이 웃었다.

 

  “아무튼, 좋아. 달링이 시킨다면 하겠어. 나중에 자료를 보내줄래? 내가 할 테니까.”

  “그럼 곧 자세한 내용을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끊으려고 하는데, 수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달링.”

  “…왜.”

  “언제나 나는 달링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줘. 달링이 무모하다고 생각되면, 나를 사용해줘. 승리하는 사람이 죽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리고 달링,”

 

  그녀는 그렇게 운을 뗐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어 물으려는 찰나, 그녀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 역시 아무것도 아니야. 자료를 기다리고 있을게. 내게 맡겨줘. 그럼 달링, 나중에 봐.”

 

  언제나와 다르게 전화를 먼저 끊은 것은 그녀 쪽이었다. 통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무감각한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남자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내고, 조용히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어두컴컴한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빗소리는, 그저 시끄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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