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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말할 수 없었다

By. 카논(@do_u_darling)

 

 

 

 

열두 번째 전화벨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반쯤 뜬 눈으로 보이는 휴대폰 화면 위에 빼곡히 적힌, 똑같은 이름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건조해진 눈을 다시 감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되지 못하고, 깊게 한숨을 쉬고서 지저분한 방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언제 자신의 소재지가 들킬지도 모르는 일이고, 자신이 쉬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남자는 무겁기 짝이 없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버려진 집을 전전긍긍하며 지내는 생활을 그가 생각했던 대로 썩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발에 치이는 것들을 제멋대로 차면서, 오랫동안 사람이 지내지 않아 먼지가 쌓인 복도를 앞으로 나아간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끝마치고 다시 방으로 나왔다. 방 역시 온기가 전혀 없어, 찬 공기가 닿는 살갗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별 의미가 없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최대한 빨리 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낸다. 이 추운 날씨에 찬물로 씻는다는 것은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를 해온 그 여자가 말했던 대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면 지금보다 상황은 나아질지도 몰랐다. 그녀는 늘 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는 여자였고, 저를 끔찍이도 아껴주고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곁에 있다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다. 곧장 따뜻한 물과 폭신한 이불도, 맛 좋은 음식이 그를 반겨줄 것이다. 여자는 여느 때처럼 그를 꼭 껴안아주며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리라. 그녀가 여태껏 다른 남자들에게 해주었을, 그때처럼.

 

이곳에서 지낸 지도 어느새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젖은 금발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남자는 문득 떠올렸다. 이제 슬슬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금방 소재지가 들켜버릴지도 몰랐다. 제 이름이 이미 상대방에게 알려진 이상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은 그의 승리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저번에 봐둔 곳도 있고, 그 여자가 그에게 알려준 곳도 있으니 둘 중에서 더 움직이기 편한 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제 체력이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여자가 모르는 곳을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뭐든지 참견해왔으니까. 괜히 제게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면 무엇보다도 빠르게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옷을 주워 입고 창 밖을 바라보니 굵고 무거운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방안을 비추는 것은 오로지 밖에서부터 흘러오는 희끄무레한 가로등뿐이었다. 그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투명한 유리창에 비춰지는 제 모습을 남자는 말없이 바라본다. 얼굴 한 쪽에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패배의 자국 위에 빗물이 흐르며 그를 비웃는 것만 같다.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뒤덮은 화상 자국을 매만졌다. 지금이야 익숙해져 버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이 존재했던 것 마냥 느껴지고 있었지만 당시에 느꼈던 고통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화상으로부터 활활 타오르는, 쓰려오던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제 안을 지배했던 패배감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작은 승리를 손에 거머쥐고 보였던 찰나의 방심은 그의 적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기회가 되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의해 그는 제 부하들을 잃고, 잠시 마나 손에 넣었던 설마 했던 상대에게 제 이름이 들켰을 때엔 어찌 되나 했지만 그 남자는 지나치게 선한 자였다. 이미 악에 손을 물들인 그로서는 그것이 그 남자의 허점이란 것을 알았다. 당시의 빠른 상황판단은 그가 살아남을 지표가 되었다. 비록 그 결과로 그는 부상을 입었지만 덕분에 그는 이렇게 목숨이 붙어 살아남지 않았던가?

 

이후 그 사건에 대해 여자는 말했다. 그가 여태껏 맛보지 못했던 승리였기에, 그는 그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러니까 자신을 책망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의 행동은 인간으로서 당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에 납득할 수가 없었다. 실수를 하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제 이름을 들키고 말다니. 그래서야 오랜 시간 동안 가명을 쓰며 살아온 보람이 없었다. 다시 그 일을 떠올리자 제 안에서부터 깊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자에게 화를 냈던 것도 분명 그 이유 때문이리라. 그는 그 날을 떠올리면서 가만히 쏟아져 내리는, 어두컴컴한 창 밖만을 한참 바라보았다.

 

두 시간 즈음 지났을까, 대강 필요한 짐만 챙겨다가 그는 이 빈집을 떠나기로 했다. 그의 동료에게서 온 연락을 빠르게 확인한 뒤, 비 오는 거리로 향했다. 푹 눌러쓴 후드 위로 거세게 떨어지는 빗소리는, 그의 외투 주머니 깊은 곳에 자리잡은 휴대폰의 진동소리를 가려주기엔 충분했다.

 

오늘도 날이 춥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새하얀 입김은 나오자마자 빗물에 섞여 사라져버린다. 그는 허물어져간 폐가 뒤에 세워두었던 바이크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가 문득,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온 것을 알아차린다. 휴대폰의 화면을 열어다 살펴본다.

 

“…또 티에라인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리고는 이번에도, 받지 않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돌려놓았다. 바이크에 키를 꽂아 넣고, 그대로 빗속을 재빠르게 주행한다. 주머니 속의 진동소리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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