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AU
중얼중얼. 웅얼웅얼. 루엔은 제 주변에 들리는 모든 말들이 마치 의미 없는 옹알이처럼 느껴져 하품이 절로 나오고 말았다. 원래 재미없는 사교모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더 재미없게 느껴지는 건 분명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제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시계만 보던 그녀가 발을 가볍게 굴렀다. 여유를 부리고 싶어도 슬슬 초조해졌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분명 이 시간 쯤 왔는데. 왜 오늘은 안 오는 걸까. 일주일 간 빠짐없이 참여해야 하는 사교모임이니, 늦어도 분명 올 수밖에 없는 것을.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지친 건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까지 자신을 기다리게 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남자다.
“아.”
마지못해 제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라도 상대해 주려던 루엔은 고개를 돌리다가 숨을 멈추었다. 언제 오나 했더니. 드디어 납셨다. 기다리던 얼굴의 등장에 미소를 감추지 않은 그녀는 양해를 구하곤 재빨리 자리를 떠버렸다.
북적거리는 파티장에 들어오는 남자의 발걸음은 조용했다. 큰 키, 시선을 잡아끄는 수려한 외모.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외견과 달리 남자의 인기척은 희미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제 눈은 못 피하지. 루엔은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목표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벽에 기대 주변을 살피던 남자는 낯선 상대의 인사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왜 내게 인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확실히 그에게 자신은 초면이겠지. 루엔은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섰다.
“혼자 왔죠?”
“무슨 볼일인지 모르겠는데. 날 아나?”
“어제 봤어요. 오늘도 여기 이렇게 가만히 서있네요?”
어제부터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게 기분 나쁜 걸까. 남자는 대답도 않고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하기 싫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 만큼 그녀가 고분고분한 사람이던가.
“뭐 하고 있어요? 마음에 드는 상대라도 찾아요?”
“할 말이 그것뿐이면 그냥 가지 그래?”
“아니면 다른 볼일? 나랑 이야기도 못 할 정도로 바쁜 일이에요?”
“…….”
남자는 계속해서 말을 거는 루엔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으로 고집이 센 여자라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겨우 그녀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자수정 색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얄밉게도, 그 눈동자 안에는 악의 같은 건 없었다. 호기심, 그리고 흥미. 루엔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들은 그다지 유해하지 않은 감정들뿐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남의 이름을 알려면 먼저 이름을 밝혀야지.”
“그건 그러네요. 로시스에요, 에소루엔 로시스. 다들 루엔이라고 부르니 그쪽도 그렇게 불러요.”
“에소루엔 로시스.”
슬쩍 그녀의 이름을 읊은 남자는 그제야 똑바로 서더니 상대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는 루엔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았고, 덕분에 없던 흥미도 생긴 모양이었다.
“바쁘신 몸이 어쩐 일로 구석에 서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지 모르겠군. 나 같은 거 말고, 말 걸어올 남자는 잔뜩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난 당신이랑 더 이야기 하고 싶은데. 그래서…, 이름은?”
“데스페라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처음 본 얼굴이니 당연하다고 할지 몰랐어도, 사교계에서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발이 넓은 자신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런 사교모임에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거, 본명?”
“글쎄다. 다들 그렇게 부르니, 그렇게 부르면 될 뿐이야.”
“흐음.”
뭐 어찌 되든 지금은 좋다. 원하는 건 알아냈으니,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면 그뿐. 루엔은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데스페라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약간은 거친 피부, 차가운 색으로 빛나는 청록색 눈도 아름답지만, 콧등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곱상한 얼굴에 색다른 맛을 준다. 정말이지 굉장한 미남이다. 제게 말을 거는 시시한 남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만하면 얼굴로 먹고 살아도 될 텐데. 직업이 뭘까.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지만 그녀는 센스 없게 제가 알고 싶은 걸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그럼. 데스페라도, 바빠요?”
“조금.”
“사람이라도 찾아요? 혹시 킬러?”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며 루엔은 웃었지만, 데스페라도는 별다른 반응도 않고 눈을 깜빡였다. 웃을 가치도 없는 시시한 농담이라고 생각해 그런 거겠지. 그의 반응을 그렇게 해석한 그녀였지만 이어지는 상대의 반응은 색달랐다.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 근처로 다가간 데스페라도가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하아. 한숨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뜨거운 숨에 루엔이 어깨를 움츠리자,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런 이야기는 큰 소리로 하면 안 되잖아? 내가 진짜 킬러면 바로 죽였을 걸.”
‘안 그래?’ 그렇게 덧붙이며 목덜미에서 떨어지는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조금만 고개를 움직여도 코가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 조각상이라도 떠올리게 하는 웃는 얼굴에 잠깐 할 말을 잃은 루엔은 뒤늦게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 같은 건 상관없었다. 자신은 역시 어제 스쳐지나가듯 본 이 남자가 마음에 든다. 그동안 만났던 어떤 사람에게도 느끼지 못한 끌림. 첫눈에 반했다는 진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정말로 데스페라도가 좋았다.
경솔하게도 감히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진짜 킬러면 날 죽이러 올 건가요?”
“노코멘트로 해둘까.”
“나 이제 내 방에 들어가서 쉴 건데, 죽이러 온다면 근사한 와인을 줄게요.”
“일류 소믈리에르가 권하는 와인이라면 나쁘지 않겠지만, 애석하게도 와인보다는 다른 술이 좋아서.”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농담인지 알기 힘든 대화 속. 두 사람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능숙하게도 유혹해 오는 루엔과 요리조리 대답을 회피하는 데스페라도 사이. 팽팽한 긴장감의 끈은 루엔의 손짓으로 끊어져 버렸다.
“다른 술이라면.”
연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이 테이블 위에서 가져온 것은 향긋한 향이 피어오르는 칵테일이었다. 과연 주류 전문가는 와인 외의 술에도 통달했다는 걸까. 그의 손에 잔을 떠넘긴 루엔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피치 레이디라고 하는 술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건데, 마셔보고 생각해요.”
“뭘?”
“날 어떻게 할지?”
그 말만 남기고 루엔은 파티장 바깥으로 향했다. 천천히, 느릿느릿. 따라올 거라면 기회는 지금이라는 걸 알려주듯, 우아하고도 여유 있게.
데스페라도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가 나풀거리며 멀어져가는 걸 보고 있다가 슬쩍 잔에 입술을 가져갔다. 과연. 향과 어울리는 아찔한 맛이 온 입에 퍼진다. 그야말로 잔을 건넨 당사자 같은 맛이다. 한 모금만 마신 칵테일을 내려놓은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대로 그녀의 뒤를 밟았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파티장을 따라 나가, 긴 복도를 지나고, 이윽고 그녀의 방 앞에 도달한다. 루엔이 문 앞에 멈춰 서자 바로 뒤쪽으로 바짝 따라붙은 데스페라도는 다시 한 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이 바뀌었어. 어떤 와인인지 궁금해졌거든.”
“그거 기쁘네요.”
후후후. 소리죽여 웃는 그녀의 숨이 달콤했다.
마치 아까 마신 술처럼. 그 손톱에 바른 복숭아 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