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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록 럼로우가 눈을 뜬 장소는 그가 지금껏 겪어봤던 모든 병원을 다 곱해 소독약으로 문질러 닦아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병실이었다. 검은 모니터 안쪽으로 심장 박동을 표시하는 선들이 짤막하게 기계음들을 남기고 뛰어올랐다가 줄어들었다. 연한 연둣빛 커튼을 통과해 들어온 햇빛이 광대뼈에 온기를 남기고 맴도는 사이에 흰 손이 침착하게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내린 이마보다 서늘한 손이었다. 그는 오래 쓰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 없는 호칭을 웅얼거렸다. 마른 웃음소리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공기 안으로 녹아내렸다.

 

  “목소리가 안 나오면 굳이 애쓸 필요 없어요.”

 

  아주 오래도록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와 굳어버린 목을 움직이는 대신 눈동자만을 돌려 제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가 떨어진 손등을 쫓았다. 손등 위에 살이 적어 주먹을 쥐면 뼈마디가 우두두 올라오는 작은 손이 공기 위에 하얀 궤적을 남기고 둥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베이지 색 하드커버에 다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앉았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온화하고, 다감하고, 온통 고요하기만 한 세상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병아리?”

  “그 염병할 호칭 좀 그만 듣나 싶었는데.”

 

  퉁명스럽게 섞인 욕설과 다정한 음색이 어색하게 맞물리며 기울어졌다. 소녀가 그 곳에 있었다. 그가 속여야 했고 유혹해야 했으며, 그러나 결국 그가 발뒤꿈치에 이마를 붙이고 갈구하게 만들었던 자그마한 동양인 소녀, 한없이 외로웠던 어린 영웅이. 잉크를 엎지른 커피처럼 검은색이 진하게 도는 흑갈색의 머리카락과 빛을 머금어 간신히 창백한 기를 몰아낸 흰 피부가 어느 소설책의 흑백 삽화에서 막 일어난 것처럼 마구잡이로 눈가를 찔러댔다.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글고 순하면서도 움푹하게 파고들어 그림자를 걷을 줄 모르던 말간 눈동자가 물결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온전한 침묵,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던 세계의 재구성. 그는 꼭 아주 따뜻한 목욕물에 잠겨있는 것 같은 기이한 온도와 먹먹함을 느꼈다. 말라붙은 목 안에서는 비틀거리는 소리가 났다. 럼로우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아주 양순한 어린 것이 된 것처럼 부드럽게 숨을 삼키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연둣빛으로 투과된 햇살이 그의 움푹하게 파인 관자놀이를 스쳐 소녀의 얼굴 근처에서 부스러졌다. 파스텔 톤으로 물든 그림자에 잠긴 다갈색 눈동자가 설핏 휘어졌다. 소녀가 웃었다. 안녕, 럼로우씨.

 

  “좋은 꿈 꿨나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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