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몇 번이고 겪은 듯이 얘기하시네요."
"너와 지낸 시간이 짧지 않으니까."
잠시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집중하고 있었을까, 음악만이 잔잔히 퍼지던 조용함 속에서 먼저 입을 연건 그녀다. 품 안에서 얼굴을 몸을 빼지도, 얼굴을 들지도 않은채 얘기해서인지 그의 가슴에 미약하지만 따스한 숨결이 천 속의 살결에까지 닿아왔다. 그 감각에 어찌할 수 없이 과거를 회상해버리는 그다. 오래 전, 만들어진 세계에서 함께 행복하게 웃으면서 지냈던 시간을... 너무도 달콤한 행복에 빠져 안일해져 있던 순간을 신은 떠올린다.
"하긴 이제 거의 1년이 되어가네요."
"...... 그래, 인간에게는 1년은 꽤나 긴 시간이지."
"토토씨에게도 긴게 아닌가요? 전 그런거라 여겼는데..."
"길다. 지독히 아득할 정도로... 동시에 한없이 짧다. 너무도 짧아서 차라리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을 만들까 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저희는 인간이잖아요. 인간에겐 그런 힘은 없어요. 신은 몰라도.."
불가능, 인간, 신... 무엇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무엇부터 바로 잡으면 될까 하고 신은 고민한다.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가장 처음 얘기해야만 하는 말은 무엇일까 하고 토토는 생각한다. 허나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떠오르는 '그녀'의 모습들이 신의 입을 무겁게 만들었다. 결국 무엇도 말할 수가 없어, 그는 그만둔다. 또 반복 될 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날을 생각하며 인간 흉내를 낸다.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낭만이라는 것도 모르는거냐."
"...... 토토씨가 낭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시니 뭔가 신기하네요."
"호오- 그럼 네가 더 신기해할 말들을 해주마."
"네?"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의 말도 자신 답지 않은 말이었다. 낭만이라니, 먼 옛날의 자신이었으면 코웃음을 친 후에 한심하다는 말까지 말했을거다. 허나, 바뀌어 버린 것을 어찌할 수 없다. 한 존재로 인해 알게 된 행복에, 애달픔에 신은 바뀌어버렸다. 정작 그것의 원인인 존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이더라도... 이미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을 품어버려 누구보다 현명하고도 냉철한 신은 자신이 또 아플 선택지를 고른다.
품 안에서 의아해하던 그녀는 자신을 살짝 떨어뜨리는 그를 자연스럽게 올려다 본다. 거기엔 어둠 속일텐데도 이상하리 만치 선명한 푸른색의 눈동자가 보여왔다. 희미한 핸드폰의 빛에 밝혀진거라 여기기엔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잘 보여옴에 시선을 움직일 수가 없는 여성이다. 신은 그런 그녀의 하얀 볼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내린다. 변함없는 부드러움에 가슴이 미약하게 통증을 호소함을 무시하며, 토토는 입을 연다.
"나는 아득할 정도로 수 없이 걸었다. 걷고 걸어 잊을거라, 흐려질거라 여겼지만 여전히 너에 대한 사랑을 알고 있다."
"......"
"많은 산들과 대지가 오르고 내리며 제 모습을 바꾸는 것을 봤지만, 그 긴 시간동안 내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
"너에 대한 이 사랑은 바보 같을 정도로 한결같다."
낮은 목소리가 나긋히 그녀에게로 흘러내렸다. 오직 그녀만을 위해 읊조려진 신의 속삭임은 진지하다. 그리고 그 진지함보다 더욱 짙은 애달픔이 베여 있었다. 감출 수 없는 그녀를 향한 마음이 흘러나와 속삭임에 담겨졌다. 신,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함을 담았다. 단 한 존재가 자신의 사랑을 알아달라는 호소를 담아냈다. 부정 당하지 않도록, 내쳐지지 않도록 고고한 신일터인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필사를 전한다.
신의 손길과 사랑을 받는 인간은 그 필살적인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아니면 일부만을 본 것일까... 그저 말없이 바라보는 그녀에 신은 알 도리가 없었다. 정적과 음악이 섞이는 모순적인 시간이 둘의 주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혼자만의 춤을 추던 선율이 멈추었을 때, 그 선율을 대신하려는 듯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열린다. 그 안에서 흘러 나올 목소리를 토토는 두려움을 가진채 기다린다.
"정말 토토씨 답지 않은 말이네요."
"알고 있다. 거기다 말도 안되는 얘기지."
"네, 그러네요. 말이 안되는 이야기인데, 저는 웃어 넘길 수 없어요."
"....."
"정말 당신이 저를 오랜 시간을 사랑해준 것 같이 느껴져요. 그만큼 토토씨가 저를 생각해준 것 같아서 무척 기뻐요."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동시에 두려워하던 대답도 아니기에 안도한 신이었다. 하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기억해내지 못한거라 여기는데, 들려온 한층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와 보여 온 미소에 희망을 느낀다. 어쩌면 다시 그날의 행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 푸른 눈동자. 그러나 그 희망은 씻어 내리게 하는 눈물이 비쳐진다. 다시 무너지려는 사랑하는 이가 비쳐진다.
"근데... 어째서일까요? 가슴이 아파와요. 토토씨에게 무언가 너무도 죄송한, 잘못한 기분이 들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너는 내게...."
"정말 없나요? 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방금까지의 미소는 투명한 눈물에 지워지고, 부드러웠던 목소리는 괴로움에 일그러진다. 분명 몇 초 전만 해도 행복했을 터인데, 다시 무너진다. 토토는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그녀를 품 안 깊숙히 끌어안는다.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 가녀린 몸이 많이 차가워져 있었다. 잘못하면 그녀의 눈물도 얼어버리지 않을까를 걱정해버린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속으로 비웃은 신은 사랑하는 이의 귓가에 속삭인다.
"아니다. 그런 일은 없었다."
"......"
"너는 내게 행복을 줬다. 진정한 사랑을 알려줬다. 그런 네가 내게 잘못한 일이라니... 바보같은 짐작이다."
"그런...가요?"
"그래, 내가 하는 말이다. 믿어라."
어느 때보다 다정하고도 따스한 목소리로 토토는 속삭인다. 괴로워하는 연인을 안심시킨다. 가늘게 떨리는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다독여준다. 잠시 그렇게 안아주고 있었을까, 이내 진정이 된 것인지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진다. 그걸 알아차린 그는 연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무릎 뒤쪽에 팔을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갑자기 공주님안기로 안아 올려져 놀란 듯한 그녀지만, 그의 '오늘은 무리 했으니, 쉬어라.' 라는 속삭임에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대로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간다. 눈은 여전히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