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시간 후, 진정이 된 사유라. 그 사이 두 잔의 커피는 밋밋한 온도로 식어졌다. 물론 우리 둘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사유라는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아마 방금까지 울었던 것이 조금 멋쩍어져서 분위기를 바꾸려는 걸거다. 내가 그 누구보다 자신의 눈물을 봤는지 알텐데도, 서투름이 많다는 여성은 여전히 부끄러워한다. 문득 그녀가 마시려던 커피에 눈이 간다. 투명한 물방울이 몇 방울이나 들어간 커피가...
"보로스 그거 제 커피..."
"......"
"............ 왜 그걸 마셔요?!!"
"맛있군."
음악을 틀은 것인지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 허나 난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내 손에는 작은 컵을 들어올린다. 내 의도를 모른채 있던 사유라는 커피를 마셔버리자 최근 듣지 못한 큰 목소리를 낸다. 나는 그 외침의 이유를 알면서도 태연하게 감상을 중얼거린다. 평소 딱히 커피가 맛있다고 느끼지 않는데, 방금의 커피는 정말 맛있게 느껴졌다. 그저 그녀의 눈물이 몇 방울 들어간 것 뿐인데도 맛이 달라질까. 마셔보길 잘한 선택이군. 이라고 생각하는데 볼이 당겨진다.
"보로스, 왜 커피를 마신거에요."
"맛있을 것 같아서."
"눈물이 들어간 커피라고요. 별 다른 맛이 날리가 없잖아요. 아니, 애초에 타인의 눈물이 들어간 커피가 뭐가 맛있어 보인다는 거에요."
"타인이라니... 너의 눈물이다. 맛있어 보이는게 당연한거다."
"그럼 제 눈물이 맛있다는 건가요?"
"맛있다."
어느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똑바로 바라봐오는 사유라. 당겨진 볼은 전혀 아프지 않다. 물론 그녀가 살살 당기는 것도 있지만, 설령 전력으로 당겨도 내게는 아픔까지로는 느껴지지 않을거다. 거기다 이렇게 따지는 모습이 귀여워 아픔이 있더라도 별 신경 쓰이지 않을거다. 또한 들려온 질문에 떠올려 버린다. 아까의 커피 맛을... 아아, 입 안에 남은 커피의 맛에 조금이라도 안일해지면 입맛을 다실 것만 같다. 그만큼 맛있었다. 사유라의 눈물은....
진심을 담아 답하자, 예전보다 혈색이 좋아진 두 볼이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물들어진다. 그 부드러운 붉은 색은 가는 목까지 번져버린다. 눈은 커져 연갈색의 눈동자가 훤히 보인다. 그 안에 비쳐진 내가 있다. 살짝 벌려진 입술이 너무도 무방비하기 짝이 없다. 아아, 이건 너무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아닌가. 아까의 커피보다 더욱 치명적인 존재가 내 이성을 뒤흔드는데 참을 수 있겠는가...
"스,스톱!"
"....."
"손가락에 키스하는 것도 안돼요."
"......"
내 입을 막는 하얀 손. 막은 것에 짜증이 났지만, 입술에 닿는 온기와 미약한 달콤한 향에 입맞춤을 하려했다. 허나 몇 번을 겪어서인지 미리 나를 제제하는 사유라에 절로 불만을 담아 바라보게 된다. 내 시선에 여전히 볼을 붉힌채 나를 바라보는 그녀. 하지만 곧 시선을 옆으로 흘겨버리더니 슬금슬금 품 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반응은 예전에도 있었다. 가벼운 입맞춤에도 부끄러워 도망치던 시절의 모습이다. 눈물이 맛있다고 한게 그렇게도 부끄러운건가.
"어디를 가려는거냐."
"자, 잠깐만 떨어져 있을려고요."
"왜지?"
"지금 보로스 눈빛이 엄청 위험해 보이거든요."
"어떻게 말이지?"
멀어지려는 허리를 잡아 세워 묻는다. 두려움이 아닌 부끄러움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나와 시선을 맞춘다. 아아, 이것조차 사랑스러워서 참기 힘들다. 왜 이렇게도 이 존재는 나를 채우는 동시에 갈증을 나게 만들까. 이런 존재는 없었는데, 이런 존재가 존재할거라 여기지 않았는데...
부드러운 몸을 만지고 싶다. 따스할 피부에 코를 부벼 향을 맡고 싶다. 심장이 두근거림에 따른 작은 진동을 느끼고 싶다. 달콤한 입술을 탐하고 싶다. 감미로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싶다. 전부, 전부, 이 존재의 모든 것에 나를 새겨 넣고 싶다. 나로 인해 흐트러지는, 나를 원하는 모습이 보고싶다. 이 욕망을 전부 쏟아내고 싶다. 소중히, 소중히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내 사랑으로 취하게 만들고 싶다.
"저기 보로스 진정하세요. 진짜 눈빛이 위험하다고요."
"문제가 뭐가 있지?"
"문제랄까... 으음."
"이번에도 없지 않나. 그럼 키스해도 되겠지?"
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모습. 다른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사유라의 경우 싫다는 반응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키스를 해도 삐질리가 없을거다. 결국 내게 무른 사유라는...
"스톱! 스톱!"
"......"
"역시 안되겠어요. 왠지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안되는거냐?"
"...네."
아직 치우지 않은 손에 다시 힘을 주는 그녀. 두 번이나 막힌 키스에 짜증보다는 간절함만이 커진다. 허나 언제나라면 결국 허락해줬을 질문에도 안된다고 하는 모습은 정말로 안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순간의 사유라의 완고함이랄까 고집은 어찌할 수 없다. 강제로 했다가는 삐져버릴거다. 평소 삐지거나 화를 내지 않는 내 연인이다만, 한번 제대로 삐진다면... 후우, 참기는 힘들지만 어쩔 수 없겠군. 이번에는 참는 수 밖에. 결국 숙였던 고개와 상체를 원래대로 하는데, 품 안에서 따스함이 멀어진다.
"키스는 하지 않을거다."
"잠깐만 떨어져 있을게요."
"아직도 내 눈빛이 위험하다는거냐."
"그것도 있고, 방금 말했다시피 부끄러워서..."
"네 눈물이 맛있다는 얘기가 왜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저도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정리가 되면 다시 곁에 다가갈게요."
"알았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나와 그녀의 차이를 느껴버린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그녀에게는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라고 한다. 아직 인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걸까, 사유라에 대한 내 이해가 적은걸까. 내 소중한 존재는 부끄러움에 옆자리로 떨어진다. 어떤 녀석은 겨우라고 할지도 모르는 거리지만, 내게는 이만큼의 거리도 애가 탄다.
내게서 떨어진 사유라는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으면 얼굴을 더 붉히거나 괜히 다른 곳을 본다. 가끔 나를 힐끗거려 봄으로 인해 굴려지는 작은 눈동자. 몇 번을 그러더니 결국 탁자 위에 엎드리며, 두 팔 속에 얼굴을 묻어버리는 그녀다.
'대체 이 귀여운 모습들을 보고 참아야 하다니. 차라리 내 눈이 머는게 더 나을거다.'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하는 내 불만이 입 안에 맴돈다. 아아- 정말 이 존재를 어찌하면 될까. 하나하나가 이렇게도 날 뒤 흔든데, 날 애타게 만드는데 왜 나는 이렇게 바라만 봐야하는걸까. 어깨에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라도 만지고 싶다. 하다 못해 온기가 느껴질만큼 가까이 앉고 싶다. 그런데도 사유라는 떨어져 있겠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도 애타는데도, 참는데도 내 연인은 떨어져 있다. 허나 욕망대로 멋대로 한다면 그녀가 상처입거나 곤란해 할거다. 그렇기에 참아야 한다. 한 순간만 참아내면 된다. 사유라가 다시 내게로 다가올 때까지. 이번에도 참아내면 된다. 정말이지, 한심하다. 예전보다 더욱 나아졌는데, 욕심은 커져 잠시 떨어지는 것도 힘들어지다니. 차라리 눈을 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