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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대 위로 새어나오는 온기는 없었다. 윤은 비참할 정도로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붕대가 감겨 본래의 손의 온기도 형태도 찾아보기 힘든 ‘그것’을 잡았다. 아직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알려오는 박동 수에 맞춘 기계음을 제외하면 꼭 관에 담긴 시체 같은 무력함이 환자가 누운 철제 침대 위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윤은 붕대에 감긴 그 ‘손’을 움켜쥐고,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등을 깊숙하게 수그려 그 끝에 제 이마를 댔다. 비어있던 가족관계서와 알아볼 수 없던 의학용어가 휘갈겨져 있던 차트와, 회색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와서 본 이 무력하고 텅 빈 모습이 시야 바깥으로 범람했다. 방금 전까지 의사의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리고 온 눈가가 다시 한 번 시큰거렸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속 안의 아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치솟았다. 윤은 꼭 원수의 뼈마디를 짓씹어 뱉는 사람처럼 한 마디 한 마디에 잇새를 대고 물어뜯었다. 차라리 죽어버리지, 이따위로 살아 남을 거면 차라리 일찌감치 죽어버리지. 콩고에서 유탄을 맞았다는 그 때나 이라크에서 옆구리가 뚫렸다는 그 때 일찌감치 죽어서, 그대로 죽어버려서, 차라리 나를 만나지 말지. 어디에다도 뱉어낼 수 없는 말들이 자꾸 혀뿌리부터 활활 불태워 진물을 떨어뜨렸다. 배신자 럼로우, 하이드라의 수족, 그딴 이름을 붙이고 이렇게 처참하게 살아남을 바에야, 그럴 바에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지, 뼛조각도 남기지 말고,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죽어버리지, 이따위로, 이따위로 살아남을 바에는…!”

 

  나를 배신해놓고 이렇게 다시 나타날 바에는, 차라리. 그녀는 우연히 들린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름을 몇 번이고 저주했다. 퓨리도 쉴드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해 잔뜩 날을 세우고 주위를 경계하던 저에게 손을 내밀던 그 때의 그를 저주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들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 머리 하나 잘린 아홉 머리의 뱀이 안정적으로 둘러싸인 낙원에서 분탕질을 쳤다. 윤은 울었다. 우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눈가에 떨어지는 모든 것들이 독액처럼 피부를 녹이고 있는 것 같았다. 길게 기계음이 울렸다가 짤막하게 바뀌는 그 모든 순간들이 폐부를 뒤집어 털었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설프게 그녀의 세계 ‘안쪽’으로 들였다가 모든 것들을 쥐어 터뜨리고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 그 곳에 있었다. ‘그림자’들이 금방이라도 그대로 그를 찢어발길 것처럼 발치에서 쉿쉿거리고 뒤엉켰다. 한순간이면 되었다. 그 순간이면 족했다.

 

  “…럼로우씨.”

 

  그러나 윤은 럼로우의 심장을 꺼내어 터뜨리는 대신 어린애처럼 그의 손에 매달렸다. 럼로우씨, 하는 부름에는 더 이상 온기 서린 손길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꼭 주문처럼, 럼로우씨, 럼로우씨, 하고 웅얼거렸다. 목 안이 뻑뻑하게 말라 소리가 찢어졌다. 럼로우씨, 나의 유다, 나의 머리 하나 잘린 아홉 머리의 뱀, 은화 30전도 배신의 입맞춤도 없이 나를 배신한 나의 유다, 나의 배신자, 나의 럼로우.

 

  해그림자가 아득하게 진 병실 안에서 눈물에 익사한 눈동자가 번득였다. 일종의 주문을 닮아 흐릿한 눈물 자국을 남기는 말들이 붕대 위로 젖어들었다. 그녀가 마른 입술에 간신히 혀끝을 댔다. 럼로우씨. 짧은 부름 안에 넘쳐나는 감정들이 일렁였다.

 

  “깨어나지 말아요. 제발, 제발 깨어나지 말아요.”

 

  애걸에 가까운 말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그녀는 이마를 그 손끝에 붙이고, 신에게 아주 간절한 기원을 올리는 시골 처녀처럼 말들을 엉성하게 토막 내어 그러묶었다. 온기도 촉각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꼭 물건을 하나 집은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더 제 이마를 그 곳에 가져다 붙였다. 차가운 병실 바닥 위로 작은 웅덩이들이 하나씩 고였다가 그녀의 무릎 앞에까지 밀려온 ‘그림자’들 아래로 녹아내렸다. 눈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눈물길이 뺨 위로 새겨졌다. 제발, 럼로우씨, 브록, 제발. 한 번도 담아낸 적 없던 이름이 입천장에 들러붙었다가 뛰쳐나왔다.

 

  “깨지 말아요, 일어나지 말아요, 차라리 그 안에 영원히 갇혀서 꿈만 꿔요. 일어나지 말아요, 다시 돌아오지 말아요, 차라리 영영…….”

 

  눈을 떠 이곳으로 돌아오면 그를 죽이러 사람들이 온다. 베일이 벗겨짐과 동시에 산산조각 난 쉴드를 떠나 모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운 그녀에게마저 남겨진 눈들이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마 개중 몇몇은 브록 럼로우의 생존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하이드라에도 쉴드에도 그의 피부를 저며 잇새 사이로 질겅거리고자 하는 인간들이 만반일 것이다. 쉴드의 배반자, 하이드라의 버려진 충견, 머리 아홉 달린 뱀의 그림자를 숨기고 빛 아래로 나섰던 타락한 군인. 그녀는 럼로우에게 매달린 수없이 많은 악담과 저주를 제대로 뱉지도 못한 채 뭉뚱그려 즈려물었다가 왈칵 피를 토하듯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가 무슨 꿈을 꿀지는 그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인 이와 죽이지 못한 이에게 수도 없이 물어뜯기는 꿈을 꿀 수도 있고, 그리 순탄치 못했다던 그 어린 날로 돌아가 몇 번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차라리 그가 그 곳에 있기를 바랐다. 산소호흡기와 심장 박동을 그려내는 모니터를 떼고 제 호흡을 쉬는 순간에 죽어버리게 될 그가 그 곳에 있기를 바랐다. 영영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그 곳에서, 하이드라도 쉴드도 그의 목줄기를 부러뜨리려 들지 않을 그 곳에서. 올가미에 묶여 날아오는 돌을 맞지 않을, 그리하여 가장 명확한 본보기로 죽어가지 않을 그 곳에서.

 

  “브록.”

 

  눈가에 우두둑 핏발이 돋았다. 그녀는 두꺼운 붕대 위로 제멋대로 입술을 눌렀다. 아버지이자 나이 든 오라비이자 선배였던 이의 이름은 잿더미를 핥는 듯 한 씁쓸한 맛을 남기고 혀 위에 낙인으로 내려앉았다. 브록.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죽은 이를 되돌리기 위해 시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엉망인 얼굴로 웃었다. 뺨 위에 짤막하게 경련이 일었다. 브록, 제발. 모니터에서 짧게 심장 박동을 모방한 기계음이 들렸다.

 

  “꿈에서 깨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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