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으로 들이친 달빛이 혜성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혜성의 연분홍 머리칼에 둥근 천사의 고리가 생겼다. 그동안은 동굴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잠을 자곤 했지만, 오늘은 한 친절한 원주민에게서 헛간을 빌릴 수 있었다. 겨우 깔고 앉을 정도의 짚더미와 낡은 나무 벽뿐임에도 그것이 푹신한 침대나 카펫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혜성은 하릴없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한 밤하늘에는 별이 쏟아진 소금만큼 많았다. 제각각 빛나는 별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혜성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언니의 목소리가. 예전 같았으면 날이 밝자마자 아카데믹 스테이션으로 달려가서 자스민에게 신나게 얘기했을 것이다. 짚더미는 의외로 편안하다고 말하면 자스민은 상냥하게 웃으며 들어주었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혜성은 아직도 자스민의 곁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혜성아, 하고 불러주는 목소리도 더는 없었다. 마치 혜성에게 신기루를 보여주려는 듯 머릿속에서 데이터가 분류되며 자스민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혜성은 그걸 끌 힘도 없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XD-26, 너 때문이야!”
낯선 호칭과 낯선 상황. 자스민은 평소와 달리 독기가 어린 눈으로 혜성을 노려보았다. 높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혜성은 이토록 화를 내는 자스민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자스민이 화를 내는 것 자체가 혜성에겐 처음이었다. 자스민은 멍청히 서 있는 혜성을 비웃으며 외쳤다.
“내가 있던 미래는 사라졌어! 현재를 택한 XD-26, 너 때문에!”
그때 혜성은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게 아니야 언니, 그렇게 말했을 때 화를 내던 자스민의 목소리만이 기억났다.
“넌 아포칼립스 프로젝트의 복제품 중 하나일 뿐이야. 난 네 언니가 아니야.”
자스민의 차가운 목소리는 혜성을 내치고 벽을 만들었다. 그 투명한 벽을 더듬으며 혜성은 실감했다. XD-26, 그것이 본래의 이름이었다. 여태까지의 기억은 전부 자스민의 것을 복제했을 뿐이며 혜성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다. 자스민은 그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며 웃었다.
“50년 후의 사람들을 모두 이 세계로 이주시킬 거야. 방해한다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이터 백업이 끝났다. 마치 한편의 짧은 영화를 몰입해서 본 기분이었다. 혜성은 가슴을 짓누르는 감정이 새삼 낯설었다. 손 밑에서 버석거리는 지푸라기가, 엉덩이 밑 돌바닥의 딱딱함이, 빨갛게 부은 눈가가 낯설었다. 이 모든 것이 자동 프로그래밍으로 발현된 감정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스민의 연구실 안에서 눈을 뜰 것만 같았다. 자스민이 모닝커피를 타주고 벨스커드에게 인사하는 나날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것이 모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그 나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혜성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너무 울어 부은 혜성의 눈에 자스민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냐며 다정하게 달래주었을 텐데. 다시금 손바닥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눈물이 기름이 아닌 소금물인 것이 우스웠다.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숨만 쉬고 살아만 있을 뿐인 인형이었으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혜성은 손바닥 가득 적시는 눈물을 그저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목적도 돌아갈 곳도 잃어버렸는데 눈물마저 막으면 제 자신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혜성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래엔 영웅이라 불릴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망설이고 그럼에도 운명에 맞서 힘껏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이런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닌 주제에,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주제에 그런 감정을 가져서. 한 세계에 품은 애정 때문에 원래의 세계는 무너졌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떠났다. 자스민의 차가운 태도도 충격이었지만, 혜성의 데이터가 도출해낸 결과가 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미래가 사라졌다면, 그렇다면, 세계의 마지막 수호자였던 벨스커드 님은? 그는 어떻게 된 거야? 혜성은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포칼립스 호를 타기 전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던 그를 죽게 내버려 둔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벨스커드는 혜성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부터 함께한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이 혜성을 이 세계의 희망이라 부를 때, 벨스커드만이 혜성을 어린 소녀로 봐주었다. 아포칼립스 호를 타기 전 그가 해준 말은 언제나 혜성의 마음속 등불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단 한 명의 소녀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세계라, 정말 재미없군.”
하지만 그 등불은 꺼졌다. 애초부터 혜성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자스민의 복제된 기억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벨스커드의 다정한 말도 그에게 두근거리던 마음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것이 자신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 혼란 속에서 혜성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