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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선명한 꿈을 꿨다. 쏟아진 소금만큼 별이 많은 밤이었다. 제각각 빛나는 별 아래 모닥불이 흔들거리며 장작을 태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네 명의 소년, 소녀들이 모닥불 주변에 앉아 있었다. 혜성의 시대에는 영웅으로 칭송받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명인 시안이 장작을 뒤집으며 해맑게 웃었다.

 

  “헤헤, 옛날 생각이 나네요.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땐 집 앞에서 야영 놀이를 했었거든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네 명의 모험가와 함께 선지자의 행방을 쫓으면서 야영했던 때의 기억이라고, 혜성의 메모리 데이터가 알려주었다. 혜성이 과거를 추억하는 것처럼, 시안이 던진 말이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각자 일렁이는 불꽃 너머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단도 평소처럼 덤덤하게, 하지만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형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밤을 새우곤 했었습니다.”

  “난 항상 스승님께 혼나곤 했는데. 오늘따라 왠지 그립네.”

 

  안젤리카도 한마디 거들며 멋쩍게 웃었다. 트리아나도 엘프답지 않은, 감정이 가득한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모든 것이 그리운 밤이네요.”

 

  후에 영웅이라 불릴 소년소녀들의 앳된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 혜성은 그것이 낯설고 놀라웠었다. 책에서만 봤던 영웅들은 책 속의 삽화와 다르게 언제나 표정이 변했다. 업적만을 써놓았던 일대기와 달리 그들은 감정을 말했다. 혜성에게는 그것이 무척이나 새로웠다. 아, 이들은 이 세계에 살아있는 사람이구나. 그 사실이 가슴에 와닿은 밤이었다. 흘러가는 데이터 속에서 혜성은 다시금 그 사실이 감탄스러웠다. 시안은 따듯한 눈빛으로 혜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혜성 님은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이 데이터가 기록되었던 당시에 혜성은 자스민과 벨스커드 이야기를 했었다. 자상하고 예쁜 언니와 다정하고 멋진 짝사랑 상대의 이야기를. 하지만 이젠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혜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작은 두 손이 시야에 가득 찼다. 그 손으론 기도도 할 수 없었다. 무너진 미래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 기도니 소원이니 소용이 없었다. 그저 펼쳐둔 손바닥 안에는 일렁거리는 불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놓아버렸다. 자스민도 벨스커드도 모두 이 손으로 놓아버렸다. 혜성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사실이 괴로웠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꿈이 아니라 데이터 백업에 의한 회상. 혜성의 본명은 XD-26. 아포칼립스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져, 자스민의 기억을 옮겼을 뿐인 클론. 그런 혜성에게 남은 기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 중에서 단 한 명, 혜성만의 기억 같은 것이. 혜성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재생되고 있을 뿐인 과거에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털어놓고 싶을 뿐이었다. 혜성은 어둠에 섞여 사라지는 불꽃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를 막아야 할지 이대로 이 세계에 살아야 할지 아니면 에너지를 전부 써버려 끝내야 할지 그것조차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에게도 기억 같은 것이 필요할까요?”

 

  네 영웅은 말이 없었다. 과거의 데이터에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건만, 장작이 타는 소리만 가득한 밤공기가 냉정하게 느껴졌다. 혜성은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이 회상을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혜성은 그러지 못했다. 안젤리카의 들뜬 목소리가 방해한 탓이었다.

 

  “와, 저기 좀 봐!”

 

  안젤리카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고 혜성을 비롯한 영웅들은 그녀의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별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가운데, 점만큼 작은 빛 하나가 순식간에 작은 호를 그리며 떨어졌다. 과거의 기억 속 안젤리카가 말했다.

 

  “저거 혜성이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데!”

 

  그 말에 에단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건 유성입니다. 혜성은 어떤 행성을 중심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도는 별을 말하는 겁니다. 몇십 년이나 몇백 년에 한 번 돌아오는 혜성도 있다고 합니다.”

  “몇십 년이나 몇백 년? 신기하네. 볼 수 있으려나?”

 

  그 나잇대 소녀처럼 웃는 안젤리카의 눈에는 빛이 가득했다. 근심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앳된 미소와 표정. 그것을 본 순간, 혜성은 마음에 불이 켜진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 중에서 혜성만의 기억이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50년 전의 현재로 오기 전에 벨스커드와 나누었던 대화의 기억. 자스민의 것이 아닌, 온전히 혜성만의 기억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벨스커드와 별을 보고 있었다. 50년 전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밤, 무너져가는 세계에도 별은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의 침묵 섞인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자신의 어깨에 이 세계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부담, 무너져가는 세계에 대한 절망, 원치 않은 이별에 대한 후회 같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가는 밤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성은 벨스커드에게 고백하려고 했었다. 벨스커드의 대답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를 볼 때마다 들었던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지, 하고 고민하는 사이, 벨스커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척 특이한 이름이었지.”

 

  무엇이? 라고 물으려 할 때, 혜성은 벨스커드가 말한 것이 자신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혜성 말이죠. 발음도 어렵고 정말 특이한 이름입니다.”

  “특별한 뜻이라도 있는 건가?”

 

  혜성은 즉시 통신기에 검색해보았다. 결과는 금세 떴다. [혜성, comet, 彗星, 가스 상태의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태양을 초점으로 긴 타원이나 포물선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운행하는 천체. 핵, 코마, 꼬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코메트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동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코메트를 혜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코메트…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별인가.”

  “그렇습니다.”

  “너의 이름이 널 결정짓는 건 아니지. 넌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아뇨,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모두가 살 수 있는 세계를 찾아오겠습니다.”

  “하…… 그 방법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언제나처럼 단호한 말투였다. 하지만 혜성은 이것이 벨스커드가 걱정하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혜성이 과거로 가는 것을 벨스커드는 탐탁지 않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벨스커드가 조금 더 솔직한 성격이었다면 혜성에게 평범한 소녀처럼 편하게 살아가라고 말했을 것이다. 혜성 역시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벨스커드에게 고백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혜성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평소처럼’이라는 말로 감추었다. 혜성은 애써 담담한 투로 말했다.

 

  “50년 전의 세계는 지금처럼 멸망하고 있는 세계는 아니겠지요. 제가 사명을 잊는다면 그곳에서 편하게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언니를, 모두를, 그리고 벨스커드 님을 잊어버린 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혜성은 벨스커드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꼭 사명을 완수하고 여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벨스커드는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답지 않게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멸망을 향해 가는 세계와 떠나야 하는 자신과 다가오는 이별. 그 속에서 혜성의 마음의 등불이 되어준 단 한 마디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인가….”

 

  아주 작아서 흘려버렸을 수도 있었을 한 마디. 그건 물음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오라는 염원도 아니었다. 아주 작은 안도의 한마디였다. 혜성은 눈을 크게 뜨고 벨스커드를 올려다보았다. 굳게 입을 다문 그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혜성은 똑똑히 들었다. 혜성이 돌아오는 것에 안도하던 벨스커드의 감정을.

 

  그 찰나의 순간은 자스민도 XD-26도 아닌 혜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만의 기억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파문이 일기 시작한 기억들, 아포칼립스 호의 불시착이나 영웅들과의 모험은 모두 혜성만의 기억이었다. 혜성은 고개를 들어 소년소녀들을 바라보았다. 이들과 함께하며 느낀 것이 있었다. 자스민도 XD시리즈도 아닌, 혜성만이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이 세계의 생명을 아름답다 느낀 것이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세계가, 그것을 막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것들이 사랑스러웠다. 그건 사명이라고 해도 좋을 확실한 감정이었다. 이 세계를 부수려 하는 자스민에게는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밝혀준 것은 단 하나뿐인 혜성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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