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서 자꾸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브록 럼로우는 어린애처럼 인상을 쓰고 손바닥에 귀를 가져다 대 몇 번 터는 시늉을 했다. 옆에서 부러 사그락 소리가 나도록 책장을 넘기던 자그마한 소녀가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진흙을 말려 붙인 것처럼 그을린 피부 위로 흰 손가락이 빛줄기처럼 달라붙는 것이 퍽 예뻐 그는 인상을 찡그리던 것도 멈추고 멀거니 고개를 돌렸다. 순하게 떨어진 둥근 눈매가 미간을 한 번 쫑긋거렸다.
“뭐에요, 그 얼빠진 표정은?”
“아아-니, 그냥…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러지, 우리 예쁜이.”
“…아, 그러세요.”
비딱하게 외로 틀어 흰 뺨 한편으로 잔뜩 그림자가 졌다. 그는 햇살 아래에서는 사금의 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아직 움직임이 서툰 손가락으로 돌돌 감았다가 부드럽게 풀어냈다. 덩치는 말만 한 사내가 제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그 나이가 되도록 천덕꾸러기 신세를 못 면하는 나이 든 오라비나 주책없는 아버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뒤로 물렸다. 톡 치면 눈물방울만 쏟아낼 것 같은 눈으로 짓는 쌀쌀맞은 표정이란 차라리 짓지 않느니만 못하단 것을 저만 모르는 모양이지. 럼로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낄낄 차오르는 웃음을 입 안으로 물어 삼켰다.
시원하게 식은 공기가 뺨 위를 스쳤다. 소녀는 초가을 맨해튼의 선선한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도록 창을 열어놓았는데, 그건 그의 상처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경미한 화상과 골절 몇 군데. 아물기도 금방 아물어 분명 금세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그의 침대맡에 서서 같이 그 이야기를 들던 소녀는 언제나 제가 아주 짜증스럽거나-혹은 아주 귀찮은 일이 생겼을 때 늘상 짓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신같은 회복력이네요, 하고 튀어나오는 뭉툭한 모서리의 말도 함께였다. 언제나 제 속을 내비치기를 그렇게 힘들어 해 안심하면 할수록 모난 말만 하는 소녀를 알아 픽 웃어버렸던 럼로우와는 달리 차트를 들고 온 의사는 뜨악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봤더란다.
“우리 병아리.”
웃음기 서린 짤막한 부름에 다시 책을 펼치려던 소녀가 뚱하게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 뺨 위로 올라오려는 그의 손등을 툭 쳐서 떨어뜨리며-이 때 럼로우는 시무룩함과 멋쩍음의 중간 정도의 표정을 지었다-더 없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물었다.
“창문 닫아줘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거 아니면 그렇게 손 높게 올리지 말아요. 피가 역류돼서 링겔 줄이 온통 피범벅이 돼 봐야 정신을 차리지.”
결국 그는 정말 제가 소녀의 주책없는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입술을 못나게 휘어 내린 채 얌전하게 침대 위로 손을 내려 포갰다. 그의 얼굴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던 소녀가 결국 헛웃음을 치며 반 쯤 열었던 책을 덮었다. 창백하도록 마른 흰 뺨이 어설프게 다가온 햇빛에 젖어 빛을 머금었다. 이봐요, 럼로우씨. 부르는 목소리 위로 웃음이 한가득 얹힌 채라 럼로우는 부러 휘어 내린 입가를 슬금슬금 풀었다. 낯설면서도 그리웠던 애정어린 관심이 마흔 줄이 다 되어가는 나이 든 사내를 자꾸 철없게 만들었다. 손에는 피를 묻히고 뺨에는 화약을 묻혀 진창을 구르던 투견은 고작해야 제 반토막이나 될까 싶은 계집애의 부름에 물거품처럼 반짝이며 녹아내렸다.
“사람 진짜 귀찮게 하네. 아니, 쉴드 있었을 때는 이렇게 주책없게 못 굴어서 어떻게 살았어요?”
“이게 무슨 주책이야? 네가 너무 쌀쌀맞은 거라고, 예쁜아.”
“별…. 잠이나 더 자요. 1인실 쓸 수 있을 때 즐기라구요.”
“이게 뭘 좋은 거라고 즐겨. 차라리 너 데리고 가려던 식당 얘기하는 게 더 즐겁겠다.”
파스타 샐러드가 맛있고, 스테이크 가장자리가 끝내주게 바삭한 곳 말이야. 소녀는 삐걱대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꼭 노래를 감상하는 듯한 태도로 다리를 한 번 바꿔 꼬았다. 소녀가 그렇게 주의를 준 손등이 공중에 몇 차례 더 휘둘려졌다. 그는 사실 좀 신이 나 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온한 세계 속의 시간이 닳을 데로 닳은 남자를 그렇게 만들었다. 라즈베리 퓨레를 끼얹은 두툼한 안심 스테이크와 몇 십 년짜리 빈티지는 아니어도 먹을만한 하우스 와인의 이야기를 소녀에게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는 세계가.
딱딱한 책 표지를 다각거리며 소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입가에 별 부스러기처럼 빛무리가 부서졌다. 그는 꼭 어린 소년이 되어 동갑내기 계집애에게 꿈결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상황을 이제야 모방하는 것은 들뜨면서도 따뜻한 목욕물에 푹 잠겨드는 느낌과 비슷했다.
“너도 가면 좋아할 걸. 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만 주인은 친절하고, 네가 좋아하는 그런-빌어먹을-오렌지 빛 전등도 있고 말이야.”
“그-빌어먹을-오렌지 빛-전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꼴을 보니 좀 가보고 싶긴 하네요.”
소녀가 씩 입술을 말아 올렸다. 낯설게 보던 얼굴이다. 그는 문득 이 광경이 너무나 아득한 느낌이 들어 눈을 껌벅였다.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다시는 뒤집혀지지 않는 세계. 반쪽의 몸을 이루듯 익숙했던 피와 화약과 쇳덩이의 파편들이 사라진 세계. 낯설고 안온하여 소중한 세계.
급한 환자가 생겼는지 문 바깥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급하게 달려가는 소리와 아득하게 먼 숨소리가 덜 닫힌 듯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절된 세계가 이만큼이나 극단적일 수 있나. 럼로우는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에 귀를 대고 탁탁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바로 문 밖을 스쳐 지나가는지 계속, 계속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이들보다 체온이 낮아 서늘하게도 느껴지는 흰 손이 귓가를 두드리던 손을 잡았다. ‘능력’을 가지고 있어 몸으로 구를 일이 적어도 가끔씩은 총이며 칼을 잡아야 해 돋아난 굳은살이 까끌하게 손등을 긁었다. 그는 왜인지 자꾸 되감아지는 것 같은 소리에 미간을 슬그머니 좁힌 채로 웅얼거렸다. 병아리야, 이상하지, 자꾸 이 앞에서만 웅성대는 것 같은데. 옅은 미소를 물었던 소녀가 그 말을 듣고 금이 간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브록.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 목소리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호칭을.
“브록.”
귓가에서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보다는 처참하고 악을 쓴다고 보기에는 연약하게, 아주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소녀가 다시 럼로우씨, 하고 그를 불렀다. 문 밖에서 새어나오던 발소리와 웅성대는 소리가 조각조각 발치로 밀려들었다. 안온함과 혼돈이 한 곳으로 뭉개져 물소리를 내며 고였다. 물결이 이는 말간 다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는 저도 모르게 귓가에서 제 손바닥을 떨어뜨렸다. 병아리야. 짧은 부름에 둥근 눈매에 한가득 고인 물기가 뺨 위로 쏟아졌다. 우리 예쁜이. 그리고 그것에 맞춰, 발소리가, 울음소리가, 밭게 내쉬는 숨이, 사라지는 온기가.
“꿈에서 깨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