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너스, 말할게 있어.”
“뭐지?”
“내 이름이 기억났어.”
“... 네 이름이 뭔데?”
떨리는 목소리를 붙잡는다. 이 순간이 오자 그때가 떠오른다. 봉인을 풀자, 하얀 빛덩이 같은 사람이 나왔었다. 마치 대낮의 찬란한 빛줄기 같았고, 나는 그의 행성이 되어 있었다. 반신이 어둠으로 물들어 평형을 유지했어도 불안한 나에게 그 빛은 생명을 줄 것 같았다. 안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좋아했고, 놓을 수 없었는데. 결국에는 기억을 찾았다… 물론 예상했지만.
“Giselle de Lorraine.”
나는 네가 실론이 아닌 지젤이라고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너는 불어를 알고 있었으니까 확신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특이한 이종인 보석형 정령의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펙트. 루시아가 연구했던 빛의 정령들 중 하나였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너를 봤었어. 물론 아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제 겨우 원래 이름을 떠올렸을 뿐이니까.
“이제 로렌, 이라고 부르면 되나?”
이제 겨우 이름을 알아냈을 뿐이라며 두려움을 억누른다. 당연하게 말을 하자. 당연하게.
“아니, 실론이라고 불러줘. 나는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좋으니까.”
“원래 이름을 두고? 게다가 홍차의 이름인데.”
“갑자기 생각난 이름 같은 거 별로 익숙하지도 않아. 그리고, 기억이 났을 때 굉장히 불길한 기분이 들었어.”
“…불길해?”
“생각, …하면 머리가 너무 아프니까… 일단은, 묻지 마. 하아, 머리가…”
“실론, 실론- 왜 그래? 괜찮아?”
급성적인 두통, 식은땀이 나고 몸을 잘 겨누지 못해 하얀 짚단 마냥 스러지는 실론을 순간적으로 들어올렸다. 아마도 그 기억에 대한 키워드를 건드는 것 만으로도 몸에 상당한 타격이 오는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침대에 눕히고 열을 재어봤다. 39.4도… 원래 실론은 보통 사람보다 몸이 따뜻한 편인 빛의 정령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지나치게 높은 것 같고…… 얼음 팩, 저번에 라니아가 치과에 다녀오고 가져왔던 얼음 팩이 있었을 텐데. 아, 여기 있다. 저기 숨어있던 하늘색 손바닥만 한 얼음 팩을 들자 투명하게 빛이 들어 푸른 젤 위에 흰 서리가 앉아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차갑겠군. 냉장고 문을 닫자 하얀 김이 나오다 푹 퍼지며 사라졌다. 얼음 팩을 흰 수건으로 꼭 감싸 양 겨드랑이에 각각 끼워주고, 가만있자…… 여기서는 병원이 멀어. 일단 몸에 다른 발진은 없고. 열만 난다고 이야기 해야 하나. 아니, 정말로 병원에 가서 해결되긴 하는 걸까? 아무리 정령이라지만, 사람의 형태를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열이 오르는 건 말이 안 돼. 그 기억에 대한 쇼크가 실론의 항상성 체계에 타격을 입혀서 아픈 거라고 밖에는 설명이 될 수 있는 게 없잖아. 여러 가설들과 병원을 가, 말아 하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아픈 적이 없었는데, 실론은 아직도 가쁜 숨을 내쉬며 분홍으로 물든 뺨 위에 빛나는 땀들을 흘렸다.
“…루미너스.”
“정신이 들어? 괜찮아? 병원에 안 가도 되겠-”
“가지 마. 그래서 해결될 건 아니니까…… 또 기억이 났어.”
“…열은 재 보자.”
“응. 당문간… 내 진짜 이름은 부르지 마, 특히 성으로.”
“알았어. 귀 대봐.”
하얗고 긴 물결 머리를 걷자, 연한 분홍빛과 거의 없다시피 한 살구색이 드러났다. 마치 대낮의 빛이 들어온 새하얀 분홍빛 살구색 천 커튼처럼, 비치는 햇살에 피부가 빛을 반사해 빛나 보일 정도다. 본인은 괜찮다지만 아직도 땀이 반질반질하게 피부를 빛내놓고 있는 와중이었고, 나는 동그랗고 작은 귀에 기계를 살살 넣었다. 언제 한번 새 온도계를 사야 할 텐데…… 아, 39.0 도. 아직 많이 아프지만…. 병원에 가지 말자고 했으니까 지켜보긴 해야겠다.
“루미너스, 이리 와봐.”
“왜?”
실론이 옷자락을 당겼다. 그래서 가까이 가자 그녀는 일렁이고 반짝이는 CD 뒷면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짧게 맞췄다.
“고마워서. 역시 꽤 섬세하네, 루미너스는.”
“…당연한 거야. 어쨌든 푹 쉬어. 그런데 너무 자면 밥을 못 먹으니까 6시에는 일어나.”
“알았어. 근데 말야, 루미너스.”
“왜?”
“나는 꽤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기억을 조금 보니까, 궁금해졌어.”
“…그래. 어쨌든 쉬어.”
실론은 한 국가의 왕 바로 밑의 신하였다. 그러니까, 왕을 빼면 가장 높은 권력가이자 정치가이다. 대법관… 그러니까, 모든 (국가의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협의회와 재판소의 의장이다. 이계에서는 국무총리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위치인데, 사법부의 기능이 좀 더 크며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진다. 게다가 왕의 총애를 받았고, 총명하고 유능한 사람. 그래, 알고 있지만… 내가 모르는 척하면서 너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꼭꼭 숨겨놓고 싶을 줄이야. 알겠어. 물론 그렇게 큰 자리에 있었다면 바로 가야겠지. 가야 하는 게 맞지만, 마음은 언제나 너를 본 순간에 멈춰 있어. 너는 저기로 가더라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여기서 너를 부르고, 부르다 안 되면 너를 내 앞에 두려고 안간힘을 쓰겠지. 알아, 이상하고 불합리하고 지나치게 이기적이지만, 네가 내 입장이 되어보면 알 거야.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욕심을 가진 존재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아, 기억을 찾으면… 과거라도 유능한 마법사인 나를 떠날 건가? 솔직히 신분 차이가 엄청난 것은 아니야. 네가 간단히 나를 버릴 것 같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네게 확신이 없어. 끝없이 불안하고, 네가 없는 시간이 벌써 두려워. 사람은 망가지는 때를 직감한 순간부터 가장 불행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그대로 있을 거라고 말해. 너는 실론이면 안될까? 그 자리는… 언제나 사람들을 보고 이끄는 자리야. 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악수하면 피가 거꾸로 흐르고, 화가 나서 눈물샘이 간지러워 질 것 같은데. 나를 밟고 간다고 해도 네 발밑에는 언제나 내가 붙어서 너를 잡을 거야. 그 정도인데, 나는….
“루미너스, 연구할 때는 언제고 그런 눈빛을 하고 와?”
“……”
발걸음이 다시 돌아왔다. 역시 지금이라도 여기 있다는 것을 보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니 내 생각이 온통 불안과 집착으로 떨려서 일이 되지 않을 것이 보였다. 식은땀을 닦는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손에 그 영롱한 땀과 내 손가락이 닿으면 기분이 마구 좋아진다. 엔도르핀이라는 이름은 모르핀이랑 그리 다르지 않다. 몸속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더 강력한 모르핀일 뿐이지, 그리고 지금 손가락이 땀에 닿는 순간에 그 엔도르핀이 빗발치고 있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 네게 닿으면 나오는 호르몬이 만약에 빛 결정이라면, 빛 결정 10개를 주면 다음에는 100개를 요구하고, 다음에는 1000개, 그 후에는 그냥 다 달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중독이다. 이런 중독이 있을 줄은 몰랐지. 그렇지만 너를 다 먹고 호르몬을 얻는다면 그것은 더 끔찍하니까. 네 존재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중독을 이겨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존재하는 게 더 좋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네 존재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생겼다. 네 존재를 공유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또 너에게 기억을 찾는다는 것은 기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계속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루미너스, 뭐가 불안해.”
“내가 불안해 보인다고?”
“떨고 있으면서, 무슨 일이야.”
실론에게 다가가 대뜸 꾹 하고 안았다. 실론을 로브와 함께 내 등을 쓸어줬다. 몸집이 작아서 손가락도 가늘어 등에는 감각이 더욱 선명했다. 실론이 묻는 통에 나는 눌러 담았던 집착 중 하나를 꺼냈다.
“기억을 찾는 일은, 네게 기쁜 일인가? 실론.”
“……그냥 신기해. 모르니까 감정도 덜한 거야. 엄청 기쁘다거나 하진 않아. 찾았더라도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모르니까.”
그것은 그나마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모르니까 당장 떠날 수도 없겠구나. 그렇겠지… 지금은 아마도 몇백 년이 지난 후라서 실론이 다시 가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지금 대법관이 임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실론이 기억을 찾았고 봉인에서 풀렸다는 걸 모르게 할 방법은 없을까. 그렇다면 그들도 실론을 찾을 수 없겠지. 정말로 이기적이지만, 꺾은 꽃은 꺾은 후에도 내 것이라고 했다. 그것만 된다면 뭐든지 괜찮아. 네가 내 것이 아니라면 그때는 내가 망가질 거야.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모두 내게, 자유 말고는 모두 내게 주고 행복하게 해줄게. 내가 없는 자유는 안돼.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 돼… 심장이 눈물에 물린 것처럼 가슴이 울적하고 아리다. 그냥 그 대답을 듣고 평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 또 끌어안고 그 너무 새하얀 살구색 빛이 나는 목에 얼굴을 묻다가 빗장뼈 쪽으로 내려가 그냥 꼭 안았다. 탐하고 싶은 건 딱히 아니야, 그냥 사랑받고 싶었다. 갈구하는 표현을 그렇게 하루하루 강력하게 배워간다. 갈구와 집착이 나의 표현이 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