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이 펄펄 나던 그 날 이후로, 기억을 알려주는 꿈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땀을 흘리면서 힘들어하지도 않고, 딱히 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으며, 평소와 같았다. 조금은, 안심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아프지 않아서, 그리고 또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전히 불안한 것은 많고,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억에 대한 것들을 듣지 않으니 괜찮은 것 같다. 하지만 실론은, 꿈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냈다고 했지. 그 뒤는 기억나지 않은 걸까? 실론의 자료를 잠시 꺼내 보다가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달력을 보았다. 11월 23일. 벌써 이렇게 되었나, 11월을 넘기고 12월을 볼 때가 되었군. 밖에는 눈이 잔뜩 쌓여 숲은 온통 하얗게 되어 초록색은 조금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엘리니아답지 않은 계절은 바로 겨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라니아는 눈을 좋아했지만, 집 앞의 눈을 치울 생각을 하니 약간은 귀찮아졌다. 실론은 눈을 좋아할까? 몸이 따뜻한 너는 어쩌면 차가운 눈을 좋아할지도 몰라. 실론과 맞는 겨울은 처음이니까…… 조금 어떤 모습을 보일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최근 피아노 치기에 취미가 생겼다며 딱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혹시 겨울을 싫어하는 건가, 저 같은 하얀 눈들은 혹시 질리는 건가 하고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난로를 계속 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의외로 추위를 많이 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역시 그저 피아노 때문인가, 라니아가 무척이나 잘 친다고 계속 칭찬했었다. 물론 나도 실론의 실력은 대단하다고 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실론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은 새벽 3시 30분, 분명히 실론은 자고 있을 시간인데도 말이다. 은색 문고리가 덜컥하는 장치 소리를 내었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루미너스…… 나, 지금 옷… 갈아입고, 있는데.”
“이 시간에 옷을 갈아입어?”
목소리가 축축이 젖어서 말도 하기 힘든 것 같았다. 마치 찌그러진 선처럼 슬픈 목소리, 아무리 들어도 옷을 갈아입고 있다는 것은 핑계였다. 그렇지만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영리한 술수겠지. 나는 실론이 시간을 벌려는 목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밤에 많이 봤겠지만… 그래도 사생활이거든,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줘.”
“사생활은 존중하겠지만- 너 울었잖아. 그것도 엄청 많이.”
“나 당황하면 잘 우는데, 가끔 걷다가 넘어지는 것처럼.”
“무엇 때문에 당황했지? 설마 …내가 그 정도로 무서운가?”
“……”
“일단 옷은 갈아입어. 그리고, 개인적인 일이라면 말하라고 계속 강요하지도 않겠어. 하지만…”
“……”
“나도 도울 수 있으니까 혼자 힘들어 하지 마.”
“… 너는 날 못 도울 거야. 나를 원망하겠지.”
“뭐?”
문 너머에서, 갑자기 선명하게 뻗은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너의 고통 같은 것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다가와 가슴을 꼭 부여잡게 만든다. 못 돕는다니, 나는 네 고통에 전혀 관여할 수도,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건가. 가슴이 턱 막힌다. 또, 터무니없었다. 내가 너를 원망? 말도 안 돼. 네가 나한테 몹쓸 짓을 저질러서 사랑할 수 없게 된다면 사랑하지 못해서 마음이 찢어질 건데, 결국은 네 앞에 서버리는 내가 있을 건데.
“원망할 거야. 내 사랑도, 행동도, 모두…. 그러니까 나를 그냥 놔줘.”
“그렇게 못해.”
실론이 문을 열고 나왔다.
“왜?”
“내가 널 어떻게 원망해.”
“……”
“결국에는 널 사랑할 건데.”
실론은 놀라서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어 보였다. 그냥 다가가서 안아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안았다. 실론은 내 등이 긁힐 정도로 세게 안고 울었다.
“모르잖아,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답은 하나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
실론은 계속 울다 지쳐 잠들어 벼렸다. 실론이 푹 잘 수 있도록 침대로 옮겨주고 가려던 찰나, 일기장이 보였다. 쓰다 만 건지 다 쓴 건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일기장에는 눈물 자국이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