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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5일]

  ……기억하지 말걸. 오늘은 그냥 후회만 드는 하루였다.

  [11월 16일]

  잠만 자다가 위가 망가진 건지 배가 아파서 밥을 먹지 못했다. 루미너스도 라니아도 집에 없는 날이라 다행이다.

  [11월 17일]

  그냥 이대로 살고 싶은데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11월 18일]

  날씨가 춥다. 기억이 돌아온 뒤로 너무 우울해졌다. 사실은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 밥도 먹지 않고 계속 피아노만 치다가 라니아에게 혼났다.

  [11월 19일]

  뤼스테르에서 날 불렀다. 11월 24일까지 왕궁으로 오라고.

  이유는 나를 사형하기 위해서라고 전달자가 말했다. 죄명은 전하를 해친 죄……

  아, 어떡하지? 그냥 자살할까? 왜 지금 와서 날 죽이려고 그래? 나는 군단장에게 조종당해서 내 나라의 왕을 죽일 뻔했다. 하지만 죽일 수 있었는데 그 순간 의식이 돌아와 빗겨나가게 쳤다. 하지만 그 덕에 전하께서 몸이 안 좋아져 나를 사형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 정말 군단장도 알 것이고 검은 마법사도 알 것이다. 조종이 흔들려서 의식이 돌아올 때가 많았고, 결국에는 날 정화하고 봉인했다. 전하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도 다 중간중간 의식이 돌아와서이고, 살생은 저지르지도 않았다. 근데, 사형? 날 알아보기는 한 거고?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계속 의식이 돌아오다가 사라져서 제어하려고 돌아가려고 안간힘을 써도 다시 의식이 없어져서 살생을 저지를 뻔했어. 알지도 못하잖아.

  [11월 20일]

  어제 일기를 잠시 봤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 기이한 행동을 보고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윗선들은 내가 의식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죽여야 할 세력의 일부분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겠지. 처음부터 죽이려고 했어. 내가 행동이 이상했는데도 국민을 선동해서 나를 살인자로 만든 모양이다. 몰래 정보를 사서 들어보니 사형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반대하는 사람은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신물 난다. 그냥 다 죽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내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릴까 무섭다. 언제나 불안하다. 나는 원래도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질투도 있었지만, 이 일 때문에 더 병이 들어버렸다. 기억이 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래왔지만 정말로 갈기갈기 찢겨 아무것도 믿기 싫어졌다. 이제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냥 죽고 싶다.

  [11월 21일]

  죽고 싶다. 그냥 이 세상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나는 내 평생을 배신당했다. 오늘도 피아노 연습을 했다. 라니아에게 연애소설도 써줬다. 촉이 좋은 라니아의 관심을 나에게서 돌리려고 온갖 일을 하고 있다. 피아노는 내가 버티지 못할 때 치는 것이 맞지만.

  [11월 22일]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이 힘들다. 오늘도 루미너스와 라니아에게 피아노를 쳐줬다. 뭔가에 집중하면 생각을 떨칠 수 있다. 그런데, 아무 생각도 없는데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 축 처지면 의심당하니까 웃고 다니자. 이것은 들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슬플 뿐이지.

  [11월 23일]

  사흘 전에 받았던 부름에 이제는 응해야 한다. 오랜 여정이 되어서 하루 일찍 가는 것은 아니고, 조금씩 오라고 독촉하는 편지가 오는 것과 내가 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죽는 것은 아닌 것 같고, 화학적으로 편안하게 죽여준다는데 못 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언젠가 그들의 역사에 억울한 죽음으로 남길 바라지도 않는데. 이제 끝이다. 병든 생활도 끝이다.

  새벽에 떠날 것이다. 루미너스가 소중한 사람을 더 잃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나쁜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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