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은 그래서 내가 원망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론은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너를 사랑할 뿐이었기 때문에, 속이 어떻게 썩었는지 모르고 덜 사랑한다고 계속 끝없이 집착하는 모습이 답답했을까? 당시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더 짜증 나고 화가 난다. 사실 지금은 약간 뇌가 마비된 느낌이라 많은 생각을 하기가 어렵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새벽의 푸르름이 푸른 괴물 같았다. 해가 다가오는 것이 무서워 하루는 왜 해가 뜨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절망은 일이 닥쳐야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안 순간부터 나를 조여오고, 일이 닥치면 이제 나를 죽이는 것이다. 나는 숨이 조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는 사람 머리맡에서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상상보다 현실은 더하다고 했는가, 실론은 떠나는 것이 아닌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하러 간다. 그리고 나는 정신적으로 죽고 말 것이다.
“…봤어?”
“이걸 왜 이제 알려줬지? 왜……?”
“미안, 그냥 어느 날 매정해져서 너를 떠나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길 바랬나 보지. 그렇게 못할 거면서.”
“……”
“나 이제 갈게.”
“거길, 간다고…?”
“응.”
실론은 챙겨두었던 짐을 가지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빠르게 멀어지는 것을 잡으려 그 뒤를 꼭 붙어 따라가고, 실론은 이제 울지 않았다.
“가지 마. 그냥 무시해. 어차피 너는 몇백 년 전의 정령이고…”
“정령은 오래 살아서 너희와 시간 감각이 달라. 그리고… 나는 이제 살고 싶지 않아.”
“왜? 왜 살기 싫은데?”
“……버려진 신뢰 때문에.”
“뭐?”
“너는 나를 영원히 배신하지 않을 수 있어? 그런 질문을 끝없이 만들어, 그럴 정도로 병들고 불안하고 지쳤어. 네게 하는 사랑도 역시 그래.”
“……그래도…”
“날 잊어, 루미너스. 그럼 갈게.”
“가지 마…….”
“이제 더 이상 소중한 사람도 잃지 말고, 행복해. 나를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물결 지고 흰 머리카락이 길게 넘실거렸다. 네 뒤통수에 눈발이 포르르 돌며 떨어지고, 너는 너무 새하얀 흰색이라 눈이 온 숲이랑 구별이 되지 않는다. 꽃이 가득한 봄, 신록이 우거진 여름, 붉게 물든 가을, 모두 새하얀 빛은 없어서 너를 볼 수 있었는데…… 너는 너를 볼 수 없는 계절에 떠난다. 네 발자국이 푹, 푹, 흰 눈을 밟고 지나가고, 내 무릎과 눈물도 그 자리에서 눈을 밟는다. 네 발자국 밑의 하얀 눈에 묻혀 죽고 싶다. 그것이 무엇이든 너의 뭔가와 함께 사라지고 싶다. 사실은 내가 너와 좋은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집착해서 상처 주지 말고 내가 너를 치료하고 보듬는 사람이길 바랐는데, 그래서 영원히 같이하고 싶다고 언젠가는 고백하려고 했는데. 그게 전부 꿈이 되었다. 아,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네 모습은 벌써 저기로 사라졌구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그게 아니라도, 그냥 벌써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