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가에 달그락달그락 이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거기에 천이 서로 쓸리는 소리와 아주 작지만 물이 보글거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보로스, 겨우 커피 끓이는 몇 분인데 거실에서 기다려도..."
"이 상태로도 끓일 수 있지 않나."
"그렇긴 한데..."
"그럼 문제 없는거다."
사유라는 전기포트란 기계로 물을 끓이는 동안 두 컵에 커피를 담아낸다. 작고도 하얀 두 손을 계속 움직이면서도 뒤에 있는 내게 말을 거는 그녀. 그런 사랑스러운 존재를 나는 또 다시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 이러면 떨어질 필요도 없고, 사유라는 제 할일을 할 수 있다. 아아, 작은 손이 귀엽다. 만지고 싶지만, 방해하면 안되니 참아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끓은 물을 컵 안에 붓는 손. 몇 번이고 본 장면은 지겹지 않다. 다음에는 내가 해야겠다. 그러면 분명 내 연인은 웃어 줄 테니까. 고맙다며 나만을 향한 미소를 지어주겠지. 나는 지금처럼 사유라를 독점할 수 있겠지.
"보로스."
"응?"
"이제 거실로 갈거니까, 팔 풀어주세요."
"그럴 필요는 없다."
"네?"
기분 좋은 생각 중 들려온 나를 부르는 목소리. 다만 언제 들어도 좋은 부름에 비해 뒤에 들려온 부탁은 조금 아쉽다. 뭐, 사유라는 원래부터 나만큼이나 함께 한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는건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연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가녀린 몸을 한 손으로 별 힘 없이 안아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두 컵을 쥔다. 그대로 나는 거실로 향한다. 이제는 이런 일이 꽤나 익숙해진 것인지, 거실에 도착할 때까지 사유라는 얌전히 있는다. 거실에 도착하자, 낮은 탁상에 컵을 내려놓고, 바닥에 앉는다. 물론 품 안의 소중한 존재는 여전히 내 팔 안에 가둬둔채다.
"커피 마시지 않을거냐?"
"보로스에겐 저는 아직 너무 약한건가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게 컵 두 잔 정도는 혼자 잘 들 수 있는데..."
바로 마실거라 여긴 커피에 손을 대지 않는 그녀에 물어본다. 들려온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 그런건가. 나는 그저 떨어지고 싶지 않음에 한 행동인데, 사유라에겐 그렇게 전달되어 버린건가. 뭐, 내 무의식 중엔 힘들게하지 말자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이번은 아니니 제대로 얘기해야겠군. 냅두면 사유라는 깊게 생각해서 혼자 끙끙거릴 수 있으니.
"그게 아니다. 나는 그저 너와 떨어지기 싫었던거다."
"과보호가 아니고요?"
"아니다. 그리고 내 기준에선 적당한 정도로 너를 위해 주는건데, 너나 다른 녀석들은 과보호라고 하는군."
"그럼 과보호가 아니지만, 그만큼 제가 위태해 보이는 건가요?"
조금은 힘없는, 떨림이 담긴 목소리. 또 사유라는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왜 너는 곧 잘 이렇게 기운이 없어지는걸까. 내가 곁에 있어 느낄 필요가 없을 불안함을 느끼는걸까. 네가 자신이 나약하다는 사실에 이렇게도 아파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네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히 말을 건낸다.
"나는 아직 너희 종족의 기준을 정확하게 모른다. 네가 말하는 위태함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다."
"......"
"하지만 나는 너에게서 위태함을 느끼긴 한다. 너는 나와 비교 했을 때, 한없이 힘이 적기에. 몸도 약하고, 가녀리기에. 그런 너를 나는 걱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너를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거다. 내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은 네가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이니까."
"그건 제가 민폐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요?"
또 이 패턴이다. 몇 번이고 반복 되어 온 대화다. 사유라는 또 복잡하게 생각하려 하며,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려 한다. 그것은 불필요할 행동이다. 살아있는 존재가 굳이 할 필요성이 없는 행위다. 그럼에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 존재는 종종 이런 행동패턴을 보인다. 과거에서 겪은 일로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
한 순간 과거를 바꾸면 사유라가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는다. 과거에 묶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고, 삶에 대해 집착이 강해져서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그녀를 상상한다. 허나 곧 그만둔다. 이것은 그저 망상이며, 굳이 과거를 바꿔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내게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쉬웠더라도 나는 바꾸지 않을거다. 바꾼다면 지금의 그녀도, 나와의 만남도 없어질지도 모르니까.
"나는 몇 번이고 답하마. 그게 아니다. 너는 내게 있어 민폐가 된다거나 짐이 되는 일은 없을거다."
"....."
"아까도 말했듯 나는 네 곁에 있을 것이고, 너만을 사랑할거다. 그런 너를 아끼며, 걱정할거다. 네가 말하는 과보호적인 행동으로 너를 지켜낼거다."
"그럼 보로스가 있는한 전 쭉 과보호 속에 있겠네요."
"혹시 싫은거냐."
진심만을 담아 얘기한다. 애초에 빙 돌려 얘기할 생각도 없지만, 분명 사유라에겐 이렇게 전하지 않는 이상 전해지지 않을거다. 아, 예전에는 전해지기는 커녕 부정당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정말 낯설고도 극심한 아픔이었다. 그건 사유라는 아직 모르는 비밀이다. 아직은 말하면 안될 비밀을 삼키며, 답변을 기다린다.
하얀 두 손이 뻗더니 잔을 감싸쥔다. 하얀 잔은 그녀의 손과 잘 어울린다. 갈색의 커피에 무언가 떨어져 파문이 퍼진다. 나는 떨어진 무언가의 이름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 그저 중요한 대답을 기다린다.
"싫지 않아요. 아니, 보로스이기에 이제는 기쁨을 느껴버려요."
"다행이군. 혹시나의 대답일까, 조금 걱정이었다."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또 그 대답이군."
"그러게요. 앞으로 전 보로스에게 몇 번이나 사과랑 감사의 말을 할까요."
"모른다. 그래도 몇 번이던 나는 상관없다. 끝까지 전부 들어주마. 너의 시간이 끝나는 때까지 함께하면서..."
우리는 결국 몇 번이고 서로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나도, 사유라도 앞으로 몇 번이고 반복할 말... 보통의 연인들은 이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저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과정이며, 표현이라는 거다. 그리고 이번에도 사랑하는 존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이제는 꽤나 편해진 다른 별의 말을 건낸다. 그러자 더 많이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 커피에 퍼지는 파문들에 의해 비쳐지지 않는 사유라의 얼굴에도 나는 말없이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는다.